국철 1047명 해고철회 투쟁이란
200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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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鐵1047名解雇撤回鬪爭とは
국철 1047명 해고철회 투쟁이란
계속되는 국철분할-민영화 반대 투쟁

1차 파업을 위해 논의하는 도로치바 조합원들(1985년 11월 쓰다누마지부)

2단계 파업으로 투쟁
1047명투쟁은 국철분할-민영화 반대투쟁의 계속이며 그 발전이다. 국철분할-민영화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공세, 민영화와 노동조합 파괴 공세의 시작이며 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노동운동의 해체, 그 핵심대오였던 국노(국철노동조합), 동노(국철동력차노동조합)을 해체할 것을 최대의 목표로 한 공격이었다. 이에 대해 국노는 한번도 투쟁하지 않고 단결이 파괴당했고 한편, 동노는 가쿠마루파인 마쓰자키가 분할-민영화의 적극적인 앞잡이가 됨으로써 연명하려고 했다. 가쿠마루는 동노 내의 가쿠마루 조직을 온존하기 위해 솔선해서 연배 조합원들에게 퇴직을 강요했고 그 결과 동노 조직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나아가 동노는 총평으로부터 탈퇴했고 그후 해산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유일하게 분할-민영화 반대 파업으로 투쟁한 것이 도로치바(국철동력차노동조합)이다. 도로치바는 투쟁함으로써 조직의 골격을 유지했고 단결을 다짐하며 오늘까지 의기양양하게 투쟁하고 있다. 이 도로치바의 투쟁이 국철분할-민영화를 통해 국철노동운동을 해체하겠다는 정부의 기도를 근간에서 물리쳤다고 할 수 있다.
국철분할-민영화 공세는 1982년 제2임시행정조사회 제4부회가 공식적으로 <국철분할-민영화>를 답신했던 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나카소네 당시 수상의 직할기관인 국철재건감리위원회가 85년 7월 분할-민영화를 위한 최종답신안을 내놓았다. 도로치바는 1985년 9월 10차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이제 상황이 여기까지 닥쳐 왔다보니 반격하자”며 파업 방침을 결정했다. 그리고 1985년 11.28~29 1차 파업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때 직접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고용안정협약>의 기한마감 문제였다.
1981년 4월1일 40만여 명이었던 국철직원이 1987년 4월1일 JR회사 출범시에는 20만여 명으로 감축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는 그리 쉽게 해고할 수는 없었다. 일본국유철도법 29조 4항에 “정리해고로 해고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기는 하되 노조 쪽이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투쟁으로 고용안정협약을 맺게 만들어 왔던 경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철당국이 인력감축을 위해 쓴 수는 전출, 일시귀휴, 조기퇴직제도 등 이른바 <해고 3수법>이었고 이들을 규정한 협약을 국노가 맺지 않으면 고용안정협약을 파기하겠다며 압박해 왔다. 국노는 물론 이 <해고 3수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로치바 역시 전출과 일시귀휴에 관해서는 협약문에 “본인의 뜻을 존중한다”고 명시돼 있는 만큼 무시했지만, 조기퇴직제도에 관해서는 퇴직금제도를 개악해서 “일찍 나가면 퇴직금을 더 많이 주겠다”는 악랄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이는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고용안정협약의 기한인 1985년 11월30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로치바는 그때가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해서 11월29일에 파업을 설정했다. 이 결단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국철시절에는 공노법(공공기업체 등 노동관계법)으로 파업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파업에 나서면 많은 조합원들이 해고와 처분을 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투쟁해야 할 때에 투쟁하지 않으면 현장의 단결이 깨지게 된다. 또 도로치바가 파업에 나서면 국노도 반드시 파업에 나서 준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도로치바의 파업에 대해 경찰이 소부선 전선에서 총 1만 명의 기동대를 동원했고 쓰다누마 전차기지에서는 3천여 명의 기동대가 에워쌌다. 도로치바는 이러한 파업압살태세를 꿰뚫고 11월28일 정오부터 다음날까지 24시간 파업을 해냈다.
국노본부는 파업 대체인력을 냄으로써 고용안정협약을 다시 맺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국노에 대한 고용안정협약은 파기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총평 내에서는 국노가 “계급적 노동운동”이라고 평가를 받았었지만 결국 체제내적인 노동운동일 뿐이었던 국노본부의 한계성이 드러난 것이다. 국노본부가 이런 꼴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 매월 만여 명 단위의 국노조합원이 국노를 탈퇴했다. 게다가 분할-민영화 전체 과정에서 200명이나 자살에 내몰렸는데 그 대부분이 국노 조합원이었다.
도로치바의 1차 파업에 대해 해고 20명 등 총 120명에 이르는 대량부당처분이 가해졌다. 그러나 도로치바는 이에 흔들리지 않고 1986년 2월15일 2차 파업을 관철했다. 이에 대해서도 해고 8명 등 대량처분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치바는 투쟁을 통해서 조직의 단결을 다짐했고 공노법에 의해 해고된 28명과, 청산사업단으로 이관된 12명 등 총 40명의 해고자가 생기면서도 탈퇴자도 없이 분할-민영화 공세를 근간부분에서 물리쳤다고 할 수 있다.
이 투쟁은 국노조합원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이 1986년 10월 슈젠지에서 열린 국노 대의원대회이다. 국노본부는 이에 앞서 1986년 7월 치바에서 열린 대대에서 “대담한 타협” 방침, 즉 동노와 마찬가지로 <노사공동선언>을 맺자는 방침을 내놓았다. 치바대대에서는 사회주의협회파(사회당 계열의 현장조직)와 혁동(일본공산당 계열의 현장조직)이 다수를 차지하는 대의원들은 기본적으로 본부방침을 인정하였다. 다만 최종적으로 이 방침을 결정하기에는 기관회의를 열기로 돼 있었다. 슈젠지대대는 현장조합원들의 분노에 밀려 치바대대 시와 같은 대의원들이 “대담한 타협” 방침을 부결했다. 이는 노동조합의 대대로서는 획기적이고 고무적인 사태였다.

도로치바 파업 돌입(1985년 11월29일 치바운전구지부)

1990년 4월 둘러싼 공방
이러한 상황에서 1987년 4월1일 분할-민영화가 강행되었다. 그리고 그때 차별적으로 채용을 거부당한 7628명의 국철노동자가 “재취업처 미내정자(未內定者)”로서 국철청산사업단으로 이관됨에 따라 JR채용을 요구하는 국철청산사업단투쟁이 시작되었다.
도로치바는 단결을 다짐하여 JR체제 하에서 투쟁에 들어갔다. 해고자 40명의 생계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물품판매 등을 시작해서 투쟁태세를 갖추면서 1988년부터 새로운 투쟁에 들어갔다. 우선 역무 및 역 내 매점 등에 강제전보된 조합원들이 파상 파업에 나섰다. 그리고 1989년 12월5일, 그 전년인 1988년에 히가시나카노역에서 열차가 충돌해서 운전사와 승객이 사망한 사건 이후 1주년을 기하여 JR체제 하에서 처음 본선 승무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는 <반합리화-운전보안투쟁>을 강화하는 투쟁인 동시에 <1990년 4월>을 위한 투쟁이었다. 즉, 청산사업단에 이관된 노동자들의 “재취업 알선”울 위한 3년의 기한이 1990년 3월말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청산사업단투쟁의 발전 여부를 건 투쟁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국노는 채용거부당한 조합원들의 노동위원회투쟁을 시작했고 1988년 들어 각 지방노동위에서 “JR에 채용하라”는 부당노동행위 구제명령을 쟁취하였다 (도로치바 역시 1990년 2월에 같은 승리명령을 쟁취했음). 그리하여 1989년 4월 시점까지만 해도 4773명이 청산사업단에서 버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노는 1989년 6월 임시대대에서 <전면일괄해결요구> 방침을 내놓았다. 이것은 지노위에서 완승하고 있다는 유리한 상황에서 어디까지나 국가적 부당노동해위를 철회시켜 나가자는 것이 아니라 “채용차별문제에서부터 1975년 파업권 파업에 대한 202억엔 손배 문제까지 한꺼번에 중노위에서 화해해결하자”는 굴복적인 방침이었다.
이 배후에서는 사회당 다나베 부위원장 등 사회당 JR특별대책위원회가 암약하며 재취업 알선 기한인 1990년 3월말까지 청산사업단 소속 노동자들을 없애버리고 투쟁을 정리하자는 굴복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1990년 3월을 둘러싼 공방은 해고철회와 JR채용을 요구하며 계속 투쟁해 온 압도적 다수의 국노조합원들이, 청산사업단에서까지 해고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투쟁을 더욱더 계속할 수 있는 건지, 만약 여기서 좌절하게 되면 그때까지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한 갈림길이었다.

청산사업단 사무실 내 (1987년 사쿠라 지소)

반나절 앞당겨 돌입한 도로치바 파업

도로치바는 이런 상황에서 1990년 1월 24시간 파업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국노조합원 15명이 도로치바에 가입했다.
그리고 3월19일 국노가 72시간 파업을 예고한 데에 연대해서 도로치바도 파업을 통고했다. 삼엄한 파업압살 책동을 뚫고 반나절 앞당겨서 84시간 파업을 18일부터 결행하였다.
왜 반나절 앞당겨 파업에 돌입했나 하면 그 직전인 16일 사회당 JR특별대책위원회가 <다나베위원회안>을 내놓았다. 이는 (1) JR가 광역모집을 다시 실시하고, (2) 일단 채용했다가 즉일 자주퇴직하면 (3) 퇴직금을 할증한다--라는 굴욕적인 것이었다. 국노가 72시간 파업을 예고한 것도 이러한 굴복 방침을 촉진하기 위한 정치적 압박 차원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로치바가 파업 돌입을 앞당겼기 때문에 국노본부도 실제로 파업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고 또 국노 현장조합원들도 힘찬 파업을 관철했기 때문에 이 3월내 화해 기도는 완전히 날려버렸다.
그리하여 1990년 4월1일 1047명이 청산사업단에서 정리해고 당해서 1047명투쟁이 시작되게 되었다. (1047명의 내역: 국노 966명, 전동노[일본공산당계열] 64명, 도로치바 9명, 기타 8명)
이때 도로치바는 “천 명 단위로 정리해고 당해서 청산사업단투쟁이 계속되게 된 것은 큰 승리다”라고 평가했다. 즉 국철분할-민영화가 강행된 이후에도 민영화 절대반대 투쟁을 계속하는 핵심대오가 등장했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보면 도로치바의 투쟁이 1047명투쟁을 낳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도로치바의 국철분할-민영화 반대 2차례 파업과 1990년에 이르는 파상적인 파업들이 국철분할-민영화반대투쟁을 계속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총평해산-렌고(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 결성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운동의 구심체가 되었다. 그리고 해고자단체인 국노투쟁단이 해고철회를 요구하며 불굴의 투쟁을 계속했기 때문이야 100만여 명에 이르는 전국의 노동자들이 거기에 스스로의 희망을 찾아서 지금까지 지원해 줘 온 것이다. 그 대부분이 렌고 산하의 노동자이고 렌고 지도부의 굴복에도 불구하고 국철투쟁의 승리를 바라며 온갖 시원을 아끼지 않았다. 곧 1047명투쟁은 국철노동운동과 1945년 이후의 일본노동운동의 모든 축적이 응축되어 낳은 투쟁인 것이다.

1047명 단결대회 (2006년 2월16일)

(1047면 투쟁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나카노 히로시 도로치바 전 위원장 지음<우리는 철로에 산다> 5장 236~266쪽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철로에 산다>는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도 판매합니다.)

국철지바동력차노동조합(DORO-CHIBA)
Chiba-shi Chuo-ku Kaname-cho 2-8, 260-0017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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