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루치바 투쟁의 역사
200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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動勞千葉 鬪爭の歷史 (2009.6)

도루치바 투쟁의 역사 (2009년판)

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 (DORO-CHIBA)
Chiba-shi Chuo-ku Kaname-cho 2-8, 260-0017 JAPAN
HP: www.doro-chiba.org/
한국어HP: www.doro-chiba.org/korean/korean.htm

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도로치바, DORO-CHIBA)은 JR동일본 회사에서 근무하는 운전사 및 차량검사수선(검수)원을 조직하는 노동조합이다. 도로치바 조합원들이 근무하는 현장은 치바현(千葉懸) 전역과, 도쿄역을 포함한 도쿄동부지역이다. 현재 조합원수는 500여명이고 그 외에 퇴직한 노동자를 OB회로 조직하기도 한다.

1. 도로치바 결성 이전의 투쟁

도로치바는 원래 국철동력차노동조합(약칭 DORO. 1950년 결성된 기관차노동조합이 1957년 명칭 변경)의 치바 지방본부였다.

후나바시 사고 해고철회 투쟁(1972년)

결성 애초는 결코 전투적인 노동조합이 아니었다가 1960년 안보투쟁(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 반대)과 62-63년 미카와시마-주루미 철도 대참사(사망자 320여 명)에 대한 분노, 기관조사 폐지 - 5만명 합리화 반대투쟁, 베트남전쟁 반대투쟁, 70년 안보-오키나와투쟁, 그리고 “생산성 향상운동”을 통한 극심한 조합파괴 공세(*)와 싸워서 승리한 경험을 통해 오늘날의 토대를 만들었다.

(* 불과 2년 동안에 DORO와 KOKURO=국철노동조합의 조합원이 6만여 명이나 감원되었음.)

또 DORO 치바지방본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두 자지 투쟁이 있었다. 하나는, 합리화와 감원으로 열차 안전운행이 위협받는 상황에 대한 투쟁이다. 72년 치바현 후나바시 역에서 열차 충돌사고가 생겨서 기관사 조합원이 체포당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철저한 합리화 결과 안전확보가 허술하게 돼서 생긴 사고”라는 입장에서 여러 차례 파업과 감속투쟁을 벌였다. 그 결과 조합원 해고를 막아 복직을 얻어냈다. 이후 “투쟁 없이 안전 없다”가 우리의 가장 핵심적인 슬로건이 되었다.

나리타공항 제트기연료 수송거부 투쟁

또 하나는 나리타(산리즈카)공항 반대투쟁과의 연대이다.(나리타는 치바현에 위치함.) 산리즈카 투쟁은 농지 침탈과 군사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농민투쟁이자 전민중적인 반권력투쟁이다. 공항 개항이 닥치며 농민들에게 극심한 탄압이 몰아치는 상황에서우리는 노농연대를 내걸고 1977-78년 제트기연료를 우리 화물차로 수송할 것을 거부하는 “100일 투쟁”을 벌였다.

2. 신생 도로치바 결성

이러한 투쟁을 벌이면서 우리 DORO 치바지본은 조직과 단결을 강화시키며 DORO 내부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민주적인 지방본부가 되었다. 반면 DORO 본부(지금의 JR총련)는 197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변질되었다. DORO본부는 1978년 전국대의원대회에서 △파업투쟁 포기 △산리즈카투쟁과의 연대 중단 등 굴복방침을 제기했고 이를 반대한 우리 치바지본 대의원과 참관인들에게 폭행을 가해 발언을 방해했다.

동노지바 결성대회(1979년 3월30일)

그리고 DORO본부는 1979년 3월, 투쟁 포기 방침을 거부한 우리 치바지본 집행부에 대해 집행권과 조합원권을 정지했고, 게다가 우리 위원장 등 4명 제명을 강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9년 3월30일 우리는 DORO본부로부터 분리-독립할 것을 결정했고 도로치바를 결성했다.

이후 2년 동안 DORO본부는 국철당국의 묵인 아래 도로치바를 파괴하기 위해 사업장 습격을 일삼았다. 우리는 많은 부상자를 내면서도 단결을 지켜내기 위해 투쟁했다.

국철당국 역시 도로치바에게 극심한 조직파괴 공세를 가했다. 제트기연료 수송 거부 파업에 관련해서 1979년 12월 나카노 히로시(中野洋) 도로치바 사무국장을 공노법 위반이라고 해고했고, 1980년 5월 조직부장을 해고했다. 1981년에 들어 3월2일부터 6일까지 전개된 파업(제트기연료 수송 저지-6만명 감원 반대)을 이유로 부위원장 등조합임원 4명을 해고했다.

3. 국철 분할민영화 반대 투쟁

도로치바 투쟁 역사 중에서 가장 격렬한 투쟁이 국철 분할민영화 10만명 해고 반대 투쟁이었다. 도로치바는 분할민영화 반대를 내걸고 국철관련 노조들 중에서 유일하게 파업투쟁에 나섰다.

나카소네 내각이 1983년 국철 분할민영화 방안을 제기한 이후 맹렬한 조합파괴 공세가 몰아쳤다. 국철 최대의 조합이었던 KOKURO는 1983년 당시 22만4천여 명이나 있었던 조합원이 1987년 민영화 강행 시에는 4만4천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또, 같은 기간 13만여 명의 국철노동자가 직장에서 쫓겨났다.

또 나카소네 수상은 “국철노동운동을 해체함으로써 총평(전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을 해체시키는 것이 국철민영화의 목적이었다.”고 훗날 공언했다. 이 국철분할민영화는 10여만 명의 국철노동자를 해고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노동운동 해체를 기도한 국가적 부당노동행위였던 것이다.

극심한 공세 속에서 국철 내 노동조합들의 대응은 2가지로 갈라졌다. ‘민영화 반대’ 입장은 우리 도로치바와 KOKURO, 전동노(全動勞)였고, ‘민영화 추진’은 DORO본부와 철노(鐵勞)였다. 특히 DORO본부는 조합해체를 추진하는데 최악의 앞잡이가 되었다.
(민영화를 적극 추진한 조합들은 민영화 이후 다 해산되었고 JR총련으로 통합되었다가 그후 JR총련과 JR연합으로 분열되었다.)

국철 분할민영화를 반대했던 KOKURO 역시 1986년 대의원대회에서 민영화에 굴복하는 방침을 결정했지만 조합원들의 거센 분노 속에서 3개월만의 임시대대에서 이 굴복방침을 번복시키기도 했다. 하지만KOKURO 본부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조합 탈퇴자가 연이었고 투쟁을 대치 못했다.

우리는 “국철 분할민영화 저지 투쟁은 모든 노동자의 미래와 노동운동의 존망이 걸린 투쟁”이라고 호소하며 가족을 포함한 조합원들과 토론을 거듭한 결과 총력투쟁 방침을 결정했다. 1985년 11월 1차 파업과 1986년 2월 2차 파업이 그 핵심이었다.

국철분할민영화 저지 파업을 위해 단결을 다지는 조합원(1985년)

이 투쟁은 전국 차원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우리는 정부발표와 언론보도가 호도하는 국철 분할민영화의 정체를, 이 투쟁을 통해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국철 분할민영화는 애초부터 타협의 여지도 없는 정도로 맹렬한 공세였지만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투쟁을 관철해서야 조합 단결을 지킬 수 있다 -- 그것이 우리 기본 입장이었다.

공권력은 파업 거점 사업장을 1만여 명의 경찰병력으로 포위하는 탄압태세를 쳤다. 반면 국철당국은 1차 파업과 2차 파업을 이유로 각각 20명, 8명의 조합원을 해고시켰다. 심지어 이 파업에 관련해서 3천만여엔의 손배소송을 제기하는 등 유례없는 강경대응에 나섰다. 또 1987년 분할민영화로 새로 생긴 JR회사에서 분할민영화 반대투쟁 이전의 파업으로 정직처분을 당했었다는 이유로 우리 조합원 중 12명을 새 회사에 채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조합원들이 의연한 투쟁을 관철했기 때문에 단결을 유지하며 민영화된 JR회사에 들어가서 투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4. 국철 분할민영화 이후 20년의 투쟁

1987년 국철이 분할민영화되었고 6개 지역별JR회사와 하나의 JR화물회사로 분할되었다. JR 체제 하에서 우리의 새로운 투쟁은 다음 4가지 과제를 두고 시작되었다.
1. 조합원들의 대량 강제배치전환과 거점사업장 폐쇄 등 심한 조합파괴와의 투쟁
2. 극한적인 감원으로 황폐된 사업장에서 합리화 반대 및 열차안전운행 확보 투쟁
3. 국철분할민영화 강행시 해고된 동지들의 해고철회 투쟁
4. 국철민영화와 동시적으로 진행된 정치적 반동과 군사대국화를 반대하며 노동운동 재생을 지향하는 투쟁.

< 조합파괴 저지투쟁 >

JR 하에서 우리 투쟁은 단속적인 파업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사측이 조합파괴를 위해 우리 운전사 조합원들을 역사 내 매점과 간이음식점으로 강제배치전환한 것에 대해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투쟁이었다(1988년 5월). 이후 조합파괴 공세와의 투쟁은 △당시 우리 거점사업장이었던 가쓰우라 전동차기지 폐쇄 기도에 대한 72시간 파업(1995년), △조합파괴를 막기 위한 항상적인 파업태세 확립(1996년 이후), △사쿠라 기관차기지 폐쇄 분쇄 투쟁(1997년), △나라시노 전동차기지 폐쇄 반대 파업(2003년12월), △배치전환 조합원들의 원직복직을 쟁취한 16일간 파업(2004년) 등 계속적으로 벌어져 왔다.

그리하여 도로치바 투쟁에 몰린 JR동(東)일본회사 측은 다테야마 운전기지 및 그 기사라즈 지구(支區)라는 도로치바 2개 거점 사업장을 폐쇄함으로써 단결을 파괴하려는, 분할민영화 이후 최대규모의 공세를 가해 왔다. 우리는 2006년 7월부터, 폐쇄가 예정된 2007년 3월까지 9개월 동안 조직의 총력을 다한 투쟁을 관철하였다. 다테야마와 기사라즈 양지부 조합원들이 앞장서서 거리선전, 지역집회, JR동회사 항의시위, 3일간 파업 등을 가지고 이 공세에 맞서 2개 사업장 폐쇄는 당했을망정 투쟁을 통해 오히려 단결과 조합 지부를 강화했다.

도로치바는 2007년 9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국철분할민영화 공세 이후 20년의 공방에서 승리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지점에 섰다”고 선언하였다. 이 공세의 목적이었던 국철노동운동 근절 기도를 물리치고 단결을 강화하면서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철분할민영화의 모순이 터지며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파탄이 드러나고 있다. 첫번째는 안전 문제, 두번째는 인원부족 문제, 세번째는 JR자본과 JR총련(가쿠마루파) 결탁 체제 등이다. 도로치바는 이들 3가지 모순에 철저히 개입하면서 분할민영화 분쇄 2차 국철결전에 돌입해 있다.

< 반합리화-운전보안확립을 위한 투쟁 >

1988년12월 도쿄 히가시나카노에서 열차충돌사고가 발생해서 도로치바 소속이 아닌 기관사와 승객이 사망했다. 이 사고는 JR사측이 무리한 증차에 따른 수송차질을 피하기 위해 정지신호를 무시하라고 운전사에게 지시한 결과 생긴 것이다. 우리는 이 사고 1주년을 기해 파업에 나섰다(1989.12). 이 투쟁을 시작으로 매년 시간표 개정시를 앞두고 운전보안확보 및 노동강화 반대 투쟁, 차량검수업무 외주화 저지 단속(斷續)파업(2002~08년), 소정외업무 비협력 투쟁 등을 현재까지 벌이고 있다.

JR에서는 2004년 이후 빈번하게 선로가 깨지는 등 민영화와 규제완화, 외주화의 결과 안전 붕괴가 심각한 상태이다. 그래서 지난 4년 동안 우리의 최대 요구는 근본적인 안전대책 실시와 규제완화 중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5년 4월25일 JR서(西)일본 아마가사키역 부근에서 열차 탈선전복사고가 발생했고 운전사와 승객 107명이 사망했다. 이는 국철 분할민영화라는 범죄적 정책이 가져온 참사였다.

도로치바는 이 사고를 중대시하고 우리 치바에서도 이러한 사고가 생길 수 있다며 5월25일부터 위험구간 감속 등 안전운전투쟁에 돌입했다. JR동일본회사에서는 이를 두고 ‘위법행위’ ‘위법쟁의’라고 해서 운전실에 관리자를 배치하며 감시와 위협을 한 데다 부당처분을 발령하는 등 투쟁을 압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3개월째 투쟁을 관철한 결과 유례없는 규모로 선로 교환을 쟁취했고 또 위험구간에 자동열차정지장치를 설치시키는 등 큰 성과를 따냈다.

그러나 이 아마가사키 사고 이후 1년도 채 안되는 2005년 12월27일 JR동일본 우에쯔선에서 다시금 5명의 목숨을 빼앗은 전복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2006년에 들어 1월7일과 11월19일 도로치바 조합원들이 운전을 담당하는 소부선에서 깨진 선로가 다시 발견되었다. 선로가 깨지는 것이 4년 연속이었다. 같은 해 1월24일에는 JR서일본 하쿠비선에서 3명의 보선공사 노동자가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보선공사 시 열차 접근을 알리는 안전확보인원을 삭감한 결과다.

JR회사의 방해를 물리치며 안전운전투쟁을 관철하는 도로치바 조합원(오른 쪽. 2006년 3월10일 도쿄역)

도로치바는 이러한 사태에 항의하여 2006년 3월10일부터 춘투-반합리화 운전보안투쟁에 들어갔다. 운행속도 감속과 72시간 파업 등 우리 투쟁에 대해 JR동일본회사에서는 극심하게 반응해서 막대한 수의 관리자들을 동원해서 운전실에서 감시를 했고 부당처분도 난발하였다.

2006춘투 투쟁이 마무리된 직후인 4월6일 마쿠하리 차량기지 구내에서 도로치바 조합원이 탈선사고를 냈다. 징계해고를 외치는 회사측에 대해 도로치바는 사고의 모든 책임은 안전대책을 소홀히 하여 위험부분을 그대로 남겨둔 회사측에 있다고 할만한 사실을 드러냈고 “해고를 강행한 경우 전조합원이 즉각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통고했다. 이렇게 싸웠다 보니 JR동일본회사에서는 사고발생 6개월만인 9월29일 출근정지 15일이라는 가벼운 처분밖에 낼 수 없었다.

JR자본에서는 아직까지 아마가사키 사고의 모든 책임을 사고로 사망한 운전사에게만 뒤집어씌우며 안전대책을 안 하고 있다. 그래서 도로치바는 매년 4월25일 규제완화와 민영화 반대를 내걸고 아마가사키 현지에서 시위행진을 벌이고 있다.

< 1047명 해고철회 투쟁 >

1047명 해고철회를 위한 집회에서 연설하는 동노지바 해고자 다카이시 조합원(2006년 2월16일)

국철 분할민영화 반대 파업을 이유로 도로치바 조합원 28명이 해고되었지만(공공기관 등 노동관계법 위반) 우리 현직 조합원들이 앞장서서 1990년 1-3월 파업을 시작으로 반격에 나섰다. 이후 매년 파업, 대중적 항의시위, 노동위원회와 법정 투쟁 등을 벌이면서 1997년 큰 승리를 거두었다. 28명 모두가 해고철회를 쟁취한 것이다.

한편 국철이 민영화돼서 JR회사가 출범했을 때 재고용을 거부당한 조합원 1047명 (도로치바 9명, KOKURO 966명, 전동노 64명 등)이 지금도 해고철회투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2008년 1047명 투쟁이 걸정적인 위기에 처했다. 해고철회라는 원칙을 포기하고 ‘정치해결’을 정부에 청하는 ‘4자-4단체’(*) 노선파가, 우리 도로치바가 아직 해고철회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1047명 단결축제’에서 배제하고 나섰다. 도로치바는 어디까지나 해고철회 원칙을 고수하며 1047명의 단결을 바탕으로 우리와 함께 하는 전국의 동지들을 규합할 것이다.

(*) 4자-4단체
- 4자: KOKURO투쟁단 전국연락회의, 철도건설공단소송 원고인단, 철도운수기구소송 원고인단, 전동노쟁의단-철도운수기구소송 원고인단
- 4단체: KOKURO, 전일본건설교통운수일반노동조합, 국철투쟁지원 중앙공투회의, 국철투쟁에 승리하는 공투회)

<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재생을 위한 투쟁 >

도로치바는 전쟁과 군사대국화, 고용과 임금, 권리, 사회보장제도의 파괴를 반대하는 동시에 노동운동 재생을 위한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1989년 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해체와 렌고(일본노동조합총연합) 출범 이후 노동조합 내셔널센터가 정부와 자본과 하나가 되며 반노동자 조직으로 변질된 상황에서 렌고 내에서 현장노동자 운동을 만들자고 도로치바가 제안하여 노동조합 활동가 집단인 <전국노동조합교류센터>를 결성하였다. 전국노조교류센터는 ‘반 렌고, 반 전노련’ ‘자립, 자투, 연대’를 내걸고 노동조합의 재생을 지향하면서 반전 정치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1991년 걸프전쟁 이후 전쟁 위기가 현실화되는 정세에서 도로치바가 주도하여 <반전공동행동위원회>을 결성했다. 또 도로치바는 이라크전쟁이 시작된 지 1주일 만인 2003년 3월27일 세계 노동자와 연대해서 <이라크전쟁 반대, 유사(有事)입법 제정 저지, 노동법제 개악 저지>를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30일까지 나흘 동안 90시간에 걸친 파업을 관철해서 600대의 열차를 멈추었다.

1998년에 들어 KANNAMA (전일본건설운수연대노동조합 칸사이 레미콘 지부)와 MINATO-GODO (전국금속기계노동조합 미나토합동) 등 현재 가장 원칙적이고 전투적으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2개 노동조합들과 함께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전국네트워크”를 창조하자고 전국 동지들에게 제기하고 있다. 그 활동가들의 노력이 모이는 자리가 매년 11월 진행되는 <전국노동자총궐기집회>이다. 이 집회는 <모든 노동자의 단결로 전쟁과 민영화-노조파괴에 대결하자>를 핵심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고 2003년 이후 ILWU(국제항만창고노조) 제10지부 등 미국 동지들과 한국 민주노총 서울본부 등 한국 동지들을 맞이하여 한미일 노동자국제연대집회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2008년 11월 노동자총궐기집회에는 5700명의 노동자들이 참석하였고 세계대공황 정세에 맞서는 국제적 진형을 만드는 데 뜻을 같이하였다.

2008년 11.2 전국노동자총궐기집회 참가자들이 도쿄 긴자(銀座)를 행진했다.

< 도로치바 2009년 상방기 투쟁 >

- 1-2월: 파견노동자 계약해지 반대 일본경단련 앞 시위.
- 2월16일: <1047명 해고철회! 09춘투 승리! 2.16 노동자총궐기집회> 주최. 800명 참가.
- 3월8일: 도로치바 결성 30주년 기념행사.
- 3월17-19일: 춘투파업 (임금인상, 운전보안, 강제전환배치 중단 등을 요구).
- 3월20일: <이라크반전 6주년 세계동시투쟁> 집회 주최. 1850명 참가.
- 3월29일: 나리타공항 반대 농노학 공투 현지집회 참가.
- 4월18일 제9기 도로치바 노동학교 개강식.
- 4월19일 및 5월10일: <출입국관리법, 외국인등록법과 민족차별 반대 집회> 참가.
- 4월24일: <호세이(法政)대학교 해방 총궐기집회> 참가.
- 4월25일: <아마가사키 철도사고 4주년 현지집회> 주최.
- 5월11일: 한일 노동자 심포지엄 ‘세계대공황 하의 노동운동 방향’ 공동주최.
- 5월20일: 재판원제도 반대 시위 참가.
- 6월14일: <국철1047명 해고철회! 노동자파견법 철폐! 개헌 저지! 아소내각 타도! 전국노동자총궐기투쟁> 주최. 2100명 참가.
- 6월15일: ‘신자유주의 감옥대학’ 법정대학교 규탄! 포위 시위 공동주최. 1200명 참가.

(2009년 7월)

국철지바동력차노동조합(DORO-CHI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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