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샌프란시스코 ‘빅 스트라이크’동영상
200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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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年 サンフランシスコ「ビッグストライキ」映像 (韓國語音聲)
1934년 샌프란시스코 ‘빅 스트라이크’동영상 (한국어 / 7:11)


1934 년 샌프란시스코 제너럴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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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年 サンフランシスコ「ビッグストライキ」映像  韓國語音聲テキスト
1934년 샌프란시스코 ‘빅 스트라이크’동영상 한국어 음성 텍스트

‘빅 스트라이크’로서 노동자들에게 전해내려오는 1934년 투쟁 이후 75년이 지났다.

샌프란시스코 부두 지역을 공공연한 전쟁상태에 빠뜨린 이 투쟁은, 미국 역사상 드문 총파업으로 노동조합 조직화를 전국으로 번지게 만드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항만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반란은, 암흑의 공황이 감도는 1934년 5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창한 항구 중의 하나인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서해안 항구도시들에서 시작되었다.

항만노동자들은 아무리 경험이 있고 익숙해져 있더라도 일거리 보장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들은 ‘셰이프 업’이라는 방식 하에 매일 아침 부두에 나가, 애써 일을 구하는 수천명 중에서 고용보스가 주워줄 것을 오로지 기다려야 했다.

보스들은 임금과 노동조건에 불만스러운 노동자를 대개 고르지 않았다. 신병 구속조차 하였다. 한편으로 뇌물을 주거나 술집에서 술을 사주는 노동자를 흔히 골랐다.

자주 고용되는 노동자마저 얼마만큼 일할 수 있는지 몰랐다. 고작 수 시간인 경우도 있고 18시간, 아니면 그 이상인 경우도 있었다. 아울러 휴계 없이 최고속도로 일해야 했다. 중대사고는 다반사였다.

그래도 시급은 고작 85센트. 항만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주당 10달러. 이러한 저임금은 공황시의 표준이었다.

항만노동자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모욕과 불안의 ‘셰이프 업’ 방식을 끝장내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노사간의 교섭에서 결정되는 임금과 노동조건 아래, 항만노동의 배정을 스스로 결정함을 원하고 있었다.

“폭력혁명을 기도하는 공산주의자다.” ? 보수적인 조합지도부, 사용자, 정치인, 언론들은 3만2천명의 항만노동자와 그 지도자를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러나 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파업에 나선 항만노동자들은, 생디에이고-시애틀 간 1900마일 해안선에 위치한 모든 항구를 봉쇄시켰다.

57일이 지난 시점에서 주 및 지방정부 당국의 지원을 받은 사용자들은 최후통고를 하였다. “파업을 중단하라. 아니면 경찰이 보호하는 대체요원을 투입해서 강제적으로 항구 봉쇄를 풀겠다”며.

1934년 7월5일, 훗날 서해안에서 ‘피의 목요일’로 알려지게 된 그 날, 사용자가 기도한 것이 무엇인가?

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중무장한 쳔여명의 경찰이 수천명의 항만노동자와 그 지지자들을 습격했다.

최루가스가 노동자들을 덮었다. 총소리가 울렸다. 트럭이 뒤집어졌고 불탔다. 외침과 비명. 남자들은 몽둥이와 야구배트, 각목을 움켜쥐며 벽돌과 돌맹이를 던졌다.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부두와 길가에 쓰러졌다.

드디어 전투복을 입은 2천여명의 국가수비대가 지사명령을 받아 라이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하여 전투지역을 침탈하려고 들어왔다.

전투는 끝났다. 2명의 노동자가 경찰의 총탄에 살해 당했고 100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다. 800여명의 민중이 연행되었다.

사흘 뒤 4만여명의 샌프란시스코 민중이, 부두에서 학살당한 노동자들을 위하여 추모행진에 모여들었다.

꽃으로 꾸며진 트럭 위에 안치된 두개 관을 따라 십 열로 마켓 스트리트을 엄숙하게 행진했다.

발을 끄는 소리, 그리고 조합의 악단이 연주하는 베토벤 장송행진곡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민중의 공감대가 확산되었고 일주일 후에는 샌프란시스코시 전역의 총파업으로 번져갔다.

긴급의료 서비스만은 유지되었지만 그 이외는 실질적으로 멈춰졌다.

주 정부는 이제 계엄령을 발령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항만노동자들은 파업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노동자평의회는 표결을 통해 총파업 수습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번 파업은 미국 노동운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승리를 찍었다.

투쟁이 프랭클린 루즈베르트 대통령을 움직였다.

루즈벨트는 “반란을 막아내라”는 사용자와 주 관리들의 목소리를 무시하였다.

그는 사용자가 부당하게도 거부하고 있었던 노동조합의 정당한 권리요구를 지지하여 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항만노동자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사용자는 정식적으로 항만노동조합을 인정하여 교섭에 나설 것 △임금인상, 주당 노동시간 제정 △ ‘셰이프 업’방식 폐지 △ 모든 고용은 노동조합이 운영하는 하이야링 홀을 통해서 배정되고 일을 고루고루 할 수 있도록 차례로 일거리를 배분할 것.

그후 얼마 안되어 항만노동자들은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창고노동자들과 결합하였다.

이리하여 국제항만창고노동조합 (ILWU)는 가장 강력하고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모든 노동조합에 영향력을 줄만한 노동조합이 되었다.

노동조합을 만들어낸 항만노동자들의 승리적인 투쟁 = 빅 스트라이크는, 미국인민에게 아주 중요한 길잡이다.

아무리 거세고 폭력적인 공격이 있더라도, 공통된 이익으로 단결된 노동자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단결된 노동자는 세상을 멈출 수 있다.
그리고 단결된 노동자는 오랫동안 빼앗겨 온 사활적 권리를 쟁취할 수 있다.
빅 스트라이크는 이 사실을 증명하였다.

국철지바동력차노동조합(DORO-CHI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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