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노지바 투쟁의 역사
200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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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노지바 투쟁의 역사

국철지바동력차노동조합

국철지바동력차조동조합(동노지바, DORO-CHIBA 은 지바현(千葉縣)과 도쿄도(都) 신코이와 지구의 기관사 및 차량검사수선(검수)원으로 조직하는 노동조합이다. 우리 조합원들이 일하는 직장은 지바현 전역과, 도쿄역을 포함한 도쿄 동부 지역이다. 현재 조합원수는 500여명이고 그 외에 퇴직한 노동자도 OB회로 조직하고 있다. JR회사가 신입사원이 동노지바에 가입할 것을 방해하고 있어서 조직화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는 국철분할민영화 이후만 해도 30여명을 조직했다.

1. 동노지바 결성 이전의 투쟁

동노지바의 전신(前身)은 국철동력차노동조합(약칭 동노. 1950년 결성된 기관차노동조합이 1957년 명칭 변경)의 지바 지방본부이다.

후나바시 사고 해고철회 투쟁(1972년)

결성 당초는 결코 전투적인 노동조합이 아니었는데 60년 안보투쟁(일미안보반대)과? 62-63년 미카와시마-주루미 철도 대참사(사망자 320여명)에 대한 분노, 기관조사 폐지-5만여명 합리화 반대투쟁, 베트남전쟁 반대투쟁, 70년 안보-오키나와투쟁, 그리고 ^생산성 향상운동 ̄을 통한 극심한 조합파괴 공세(불과 2년 동안에 동노와 국노{국철노동조합}의 조합원이 6만여 명이나 감원되었음)와 싸워서 승리한 경험을 통해 오늘날의 토대를 만들었다.

또 동노 지바지방본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두 자지 투쟁이 있었다. 하나는, 합리화와 감원으로 열차 안전운행이 위협받는 상황에 대한 투쟁이다. 72년 지바현 후나바시 역에서 열차 충돌사고가 생겼고 기관사 조합원이 체포당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철저한 합리화의 결과 안전확보가 허술하게 돼서 생긴 사고 ̄라는 입장에서 여러 차례 파업과 감속투쟁을 벌였다. 그 결과 조합원 해고를 막아 복직을 얻어냈다. 이후 ^투쟁 없이 안전 없다 ̄가 우리의 가장 핵심적인 슬로건이 되었다.

나리타공항 제트기연료 수송거부 투쟁

또 하나는 나리타(산리즈카)공항 반대투쟁과의 연대이다.(나리타는 지바현에 위치함) 산리즈카 투쟁은 농지 침탈과 군사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농민투쟁이자 전민중적인 반권력투쟁이다. 우리는, 공항 개항이 닥쳐 농민들에게 극심한 탄압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노농연대를 내걸고 1977-78년 제트기연료 화물차수송을 거부하는 ^100일 투쟁 ̄을 벌였다.

2. 신생 동노지바 결성

이러한 투쟁 속에서 우리 동노 지바지본은 조직과 단결을 강화시키며 동노 내부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민주적인 지방본부로 되었다. 반면 동노 본부(지금의 JR총련)는 197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변질했다. 1978년 전국대의원대회에서 ≠파업투쟁 포기 ≠산리즈카 투쟁과의 연대 중단 등 굴복방침을 제기했고 이를 반대한 지바지본 대의원과 방청자에게 폭행을 가해 발언을 방해했다.

동노지바 결성대회(1979년 3월30일)

그리고 동노본부는 1979년 3월, 투쟁포기 방침을 거부한 지바지본 집행부의 집행권과 조합원권을 정지시켰고, 게다가 위원장 등 4명의 제명을 강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9년 3월30일 우리는 동노본부로부터 분리-독립할 것을 결정했고 동노지바를 결성했다.

이후 2년 동안 동노본부는 국철당국의 묵인 아래 동노지바를 파괴하기 위해 직장습격을 일삼았다. 우리는 많은 부상자를 내면서 단결을 지켜내기 위해 투쟁했다.

국철당국 역시 동노지바에게 극심한 조직파괴 공세를 가했다. 제트기연료 수송거부 파업에 관련해서 1979년 12월 나카노 동노지바 서기장(사무국장)을 공노법 위반으로 해고했고, 1980년 5월 조직부장을 해고했다. 1981년에는 3월2일부터 6일까지 계속된 파업(제트기연료 수송저지-6만명 감원 반대)을 이유로 부위원장 등 4명의 조합임원을 해고했다.

3. 국철분할민영화 반대투쟁

동노지바의 투쟁 역사 속에서 가장 격렬한 투쟁이 국철분할민영화-10만명 해고 반대투쟁이었다. 동노지바는 분할민영화 반대를 내걸고 국철노동자 중 유일하게 파업투쟁에 나섰다.

나카소네 내각이 1983년 국철 분할민영화 방침을 제기한 이후 맹렬한 조합파괴 공세가 몰아쳤다. 국철 최대의 조합이었던 국노는 1983년에 22만4천여명이 있었던 조합원이 1987년 민영화 강행시에는 4만4천22만4천명으로 줄어들었다. 또, 같은 기간 13만여 명의 국철노동자가 직장에서 쫓겨났다.

또 나카소네 수상은 ^국철노동운동을 해체함으로써 총평(전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을 해체시키는 것이 국철민영화의 목적이었다 ̄고 훗날 공언했다. 이 국철분할민영화는 10여만 명의 국철노동자를 해고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노동운동 해체를 기도한 국가적 부당노동행위였던 것이다.

극심한 공세 속에서 국철 내 노동조합들의 대응은 2가지로 갈라졌다. `민영화 반대¨는 우리 동노지바와 국노(국철노동조합), 전동노(全動勞)이며, `민영화 추진¨은 동노본부와 철노(鐵勞)였다.? 특히 동노본부는 조합해체공격의 최악의 앞잡이가 되었다.
(민영화를 추진했던 조합들이 민영화 이후 다 해산되어 JR총련으로 통합되었고 그후 JR총련과 JR연합으로 분열되었다.)

국철분할민영화를 반대했던 국노 역시 1986년 대의원대회에서 민영화에 굴복하는 방침을 결정했지만 조합원들의 거센 분노 속에서 3개월만의 임시대대에서 이 굴복방침을 번복하기도 했다. 본부가 흔들리는 속에서 국노 탈퇴자가 잇따랐고 투쟁을 대치할 수 없었다.

우리는 국철분할민영화 저지 투쟁은 모든 노동자의 미래와 노동운동의 존망이 걸린 투쟁이라고 호소하면서 가족을 포함한 조합원과 토론을 거듭한 결과 총력투쟁 방침을 결정했다. 1985년 11월 1차 파업과 1986년 2월 2차 파이 그 핵심이었다.

국철분할민영화 저지 파업을 위해 단결을 다지는 조합원(1985년)

이 투쟁은 전국 차원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우리는 정부발표와 언론보도가 호도하는 국철분할민영화의 정체를, 이 투쟁을 통해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국철분할민영화는 처음부터 타협의 여지도 없는 정도로 맹렬한 공세였지만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을 관철해서야 조합 단결을 지킬 수 있다--이것이 우리의 기본 입장이었다.

공권력은 파업 거점직장을 1만여 명의 경찰병력으로 포위하는 탄압태세를 쳤다. 반면 국철당국은 1차 파업과 2차 파업을 이유로 각각 20명, 8명의 조합원을 해고시켰다. 심지어 이 파업에 관련해서 한 3천만엔의 손배소송을 제기하는 등 유례없는 강경대응에 나섰다. 또 1987년 분할민영화로 생긴 JR회사는 분할민영화반대투쟁 이전의 파업으로 정직처분을 당했었다는 이유로 우리 조합원 중 12명을 채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의연한 투쟁으로 단결을 유지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합원이 JR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고 직장투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4. JR 체제하에서 새로운 투쟁 시작

동노지바는 JR에서 새로운 투쟁을 시작했다. 과제는 다음 4가지였다.

1. 국철분할민영화시 해고된 동지들의 해고철회투쟁
2. 조합원들의 대량 강제전보와 거점직장 폐지 등 조합파괴를 저지하는 투쟁
3. 대량감원으로 황폐된 직장에서의 합리화반대 및 열차안전운행확보 투쟁
4. 국철민영화와 일체로 진행된 정치반동과 군사대국화를 반대하며 노동운동 재생을 쟁취하는 투쟁.

<직장 투쟁 1> 조합파괴 저지투쟁
JR회사는 조합해체를 위해 조합원 기관사들을 역의 매점과 간이음식점으로 강제 전보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1988년 5월 원직복귀을 요구해서 단속적인 파업에 나섰다. JR에서의 직장투쟁은 이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투쟁을 중심으로 조합해체 분쇄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1995년 당시 우리의 거점직장이었던 가쓰우라 운전구(運轉區)를 폐지하려던 움직임에 대해 72시간 파업 ≠조합해체를 막기 위해 1996년 이후 항상적 파업체제 수립 ≠1997년 사쿠라 기관구 폐지 분쇄 투쟁.

<직장투쟁 2> 반합리화-운전보안확립을 위한 투쟁
1988년12월 도쿄 히가시나카노에서 열차충돌사고가 나서 동노자바 소속이 아닌 기관사와 승객이 사망했다. 이 사고는 JR당국이 수송혼란을 막기 위해 정지신호를 무시하라고 기관사에게 지시한 결과 생긴 것이다. 우리는 이 사고 1주년을 기해 파업에 나섰다(1989.12). 이 투쟁을 시작으로 매년 시간표 개정시를 앞두고 운전보안확보 및 노동강화 반대파업을 벌이고 있다.

JR에서는 2004년 이후 선로파단이 빈발되는 등 민영화와 규제완화, 외주화의 결과 `안전붕괴¨가 심각한 상태이다. 그래서 지난 2년의 우리의 최대 요구는 발본적인 안전대책 실시와 민영화-규제완화정책의 중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4년 4월25일 JR서일본 아마가사키역 부근에서 열차 탈선전복사고가 발생했고 기관사와 승객 107명이 사망했다. 이는 국철분할민영화라는 범죄적 정책이 가져온 대참사였다.

JR회사의 방해를 물리치며 안전운전투쟁을 관철하는 도로치바 조합원(오른 쪽. 2006년 3월10일 도쿄역)

동노지바는 이 사고를 중대시하고 5월25일부터 위험구간에서 속도를 줄이는 등 안전운전투쟁에 돌입했다. JR동일본회사는 이를 `위법행위¨ `위법쟁의¨로 규정해 운전석에 관리자를 배치하면서 감시와 위협을 한데다 부당처분을 발령하는 등 투쟁을 압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3개월 동안 투쟁을 해냈고 그 결과 유례없는 규모로 선로 교환을 쟁취했고 또 위험구간에 자동열차정지장치를 설치시키는 등 큰 성과를 거뒀다. 지금도 계속 안전운전행동을 벌이고 있다.

<직장투쟁 3> 검수직장 외주화 저지투쟁
동노지바는 마쿠하리 차량센터(기지)에서 검수업무 외주화를 막고 있다. 전국에서 지바만이 검수업무 외주화가 중단되고 있다.

JR동일본은 조합에서 외주화계획을 받아들이면 정년퇴직자를 위탁회사에서 고용하도록 하겠다고 비겁한 제안을 했다. JR총련 동노조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우리는 외주화를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며 제안을 거부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재고용을 원하던 조합원들과 격렬하고 원칙적인 토론을 거쳐 단결을 유지했다. 그 결과 위탁회사가 재고용요원을 확보할 수 없게 되어서 외주화가 무산되었다. (검수업무가 기술직이라 경험자가 아니면 할 수 없다.) 게다가 퇴직자의 재고용도 쟁취했다.

마쿠하리에서는 그 외에 일상적인 비협력투쟁을 통해 증원을 쟁취하고 있다. 시간외 및 휴일근무를 거부하는 한편 노동자의 긍지로 하나하나의 작업을 공들여 하기 때문에 시간 내에 일이 끝나지 않고 요원부족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요구를 해서 증원을 쟁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상외로, 동노지바라는 이유로 역 업무 등에 강제전보되었던 조합원들이 제 직장에서 돌아오고 있다.

해고철회투쟁
1990년1-3월 파업을 시작으로 한 매년의 파업, 대중적 항의행동, 노동위원회투쟁과 재판투쟁을 벌이던 과정에서 1997년 큰 승리를 이루었다. 국철분할민영화 저지 2차례 파업에 대한 보복으로 해고된 28명 모두가 해고철회를 쟁취했던 것이다.

1047명 해고철회를 위한 집회에서 연설하는 동노지바 해고자 다카이시 조합원(2006년 2월16일)

그러나 JR동일본은이 과정에서도 심한 공세를 가해왔다. 1990년 3월 파업을 앞두고 회사가 조합사무실을 원천봉쇄했기 때문에 우리가 항의해서 파업 돌입을 예정보다 앞당기자 이를 ^위법파업 ̄으로 규정해 조합에 2천만여엔 손해배상을 제기했다.

국철민영화로 생긴 JR회사가 조합차별로 채용을 거부한 조합원 (동노지바, 국노, 전동노 소속) 1047명이 지금도 계속 해고철회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 이 1047명 속에, 투쟁을 포기해서 정부에 애소하는 `정치해결¨ 노선이 떠오르고 있는데 동노지바는 어디까지나 `1047명 단결-해고철회¨ 노선을 견지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반전-정치투쟁
또 우리는 전쟁과 군사대국화, 고용과 임금, 권리, 사회보장제도의 파괴를 반대하는 동시에 노동운동 재생을 위한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1989년 총평(일본동조합총평의회) 해체와 연합(RENGO) 출범 이후 노동조합총연맹이 정부-자본과 함께하고 노동운동을 억제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전국 차원에서 호소해서 노동운동 재생을 위한 노조할동가 조직 결성을 주도했다. <전국노동조합교류센터>가 그것이다. 1991년 걸프전쟁을 계기로 전쟁 위기가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반전공동행동위원회> 결성을 주도했다. 또 1998년에 들어 칸나마 (전일본건설운수연대노동조합 칸사이 레미콘 지부)와 미나토합동 (전국금속기계노동조합 미나토합동) 등 현재 가장 원칙적이고 전투적으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2개 노동조합과 함께 ^투쟁하는 노동조

전국노동자총궐지집회(2005년 11월6일)

합의 전국네트워크 ̄ 창조를 제기하고 있다. 그 활동가들의 모임이 매년 11월 진행되는 <전국노동자총궐기집회>이다. 이 집회는 <모든 노동자의 단결로 전쟁과 민영화-노조파괴에 맞서자>를 메인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고 2005년 11.6노동자집회에는 4600명이 집결했다. 또 2003년 11월집회부터 ILWU(국제항만창고노동조합) Local 10 등 미국 노동동지와 한국 민주노총 서울본부 등 한국 노동동지들의 참석을 얻어 한미일 노동자국제연대집회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동노지바는 이라크전쟁이 시작된 지 1주일 만인 2003년 3월27일 세계 노동자와 연대해서 <이라크전쟁 반대, 유사(有事)입법 제정 저지, 노동법제 개악(*) 저지>를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30일까지 나흘 동안 90시간에 걸친 파업을 관철해서 600편의 열차를 멈추었다. (*비정규직화와 해고자유의 법제화) 또 같은 해 6월28일 열린 49차 정기위원에서 <동노지바 전쟁협력저지선언>을 채택했다.

2006년 9월26일 아베 내각이 출범했다. 전쟁 이후 수상으로 처음 헌법개정을 공언하며 그 시작으로 교육기본법과 헌법개정 국민투표법 제정을 기도하고 있다. 엄청난 극우-파시스트, 개헌-전쟁돌입 내각이다. 그러나 아베는 1945년~70년대의 일본 노동자의 강력한 투쟁을 겪지 않은 세대이다. 노동자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다. 이것이 아베의 최대의 약점이다. 사실 아베에 대한 노동자들의 위기감과 분노가 불거지고 있다. 동노지바는 철도노동자와 교육노동자, 지자체노동자, 우체노동자를 비롯한, 전쟁과 민영화-노조파괴에 맞서는 모든 노동자와 함께 교육기본법 및 헌법 개악 저지, 아베정권 타도를 위해 강력히 투쟁할 것이다. 직장에서 거리에서 힘차게 싸울 것이다.

(2006년 10월)

국철지바동력차노동조합(DORO-CHI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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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 +81-43(222)7207 FAX +81-43(224)7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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